제3장 반란_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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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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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골이 지끈거린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다. 무엇하나 예전의 감각을 갖춘 것이 없다. 몽롱하던 의식이 점차 가닥을 잡으면서 프롬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은 금속 의자에 결박되어 있었다. 팔과 다리는 철제 수갑으로 단단히 채워졌고, 가슴 또한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문득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뇌리를 스친다.
‘그래... 프리츠. 그 녀석의 살을 뜯던 중이었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불현듯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끝장이다. 끝장이야.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그래! 분명한 건...
‘젠장! 나보다 먼저 프리츠를 공격한 건 헬튼이었어. 그 녀석이 주범이라고! 난 그저 시체를 먹었을 뿐이야!’
일의 선후나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란 그 어떤 감정이나 이성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프롬은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난 아냐! 헬튼이 죽였어! 난 죽은 고기를 먹었을 뿐이라고!”
“헬튼이라고...?”
철제문 상단에 난 작은 유리창 너머로 프롬의 상태를 지켜보던 볼의 눈빛이 번갯불처럼 빛났다. 그는 프롬이 감금된 취조실을 지키던 블론 대위에게 명령하여 문을 열고 존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난 프리츠 중사를 죽이지 않았어! 난 죽은 고기를 먹었을 뿐이야!”
프롬은 취조실의 철문이 열리고 볼과 존이 발을 들일 때까지 이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존은 이성을 잃은 프롬의 고함 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리츠 중사를 고기라니...’
프롬은 미쳐 있었다. 미치지 않았다면 음식이 풍족한 함 내에서 인간의 살을 뜯어먹는 상식 밖의 짓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프롬은 고함을 뚝 멈추었다. 그는 볼과 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이다. 프롬은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을 한 주제에 어처구니없게도...
볼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겠나, 프롬?”
“난 죽이지 않았어요, 함장님! 프리츠 중사를 죽인 건 헬튼이라고요!”
프롬은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볼은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고는 상대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음성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물었다.
“헬튼이 프리츠 중사를 죽인 후, 네가 프리츠 중사의 살점을 뜯어먹었다는 말이지?”
“그래요! 사실은! 아, 아니...”
헬튼이 죽인 줄 알았던 프리츠 중사가 아직 죽지 않은 바람에 자신이 이빨로 물어뜯었다는 말을 무심코 내뱉으려던 프롬은 급히 말을 삼켰다.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결국 살인자는 자신이 된다. 이걸 그대로 까발릴 수는 없다. 이성을 차리고, 어떻게 하든지 헬튼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야 해! 헬튼이 죽였다고 우기면, 어쩌면 사형만은 면할 수 있을 지도 몰라.
프롬이 염두를 굴리느라 대답을 머뭇거리자 볼은 더욱 부드러워진 어조로 물었다.
“좀 더 자세한 진술이 필요하다, 프롬. 헬튼이 어떻게 프리츠 중사를 죽였지?”
마침 프롬은 머릿속으로 합당한 변명을 조합했다.
“바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난 후, 난 프리츠 중사를 뒤따라갔습니다.”
“카메라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말이지?”
“예, 그래요. 카메라를 피하는 건 식은 죽 먹기죠. 그러고는 적당한 장소에서 프리츠 중사를 기습하여 보복을 하려고 했죠.”
“죽이려고 했나?”
“아, 아닙니다. 맹세코! 난 그저 날 때린 프리츠 중사에게 분풀이만 하려고 한 겁니다. 죽일 의사는 전혀 없었어요!”
“그래, 그렇겠지. 넌 프리츠 중사를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을 거야.”
볼의 호의적인 응수에 프롬은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난 기회를 포착하고 프리츠 중사가 통로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 재빨리 뒤따라가 덮쳤죠.”
“그 지점은 P24 통로였겠지.”
“그래요! 난 주먹으로 한 대쯤 후려치고는 욕설을 퍼부어 주려고 했죠. 정말 그 정도로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모퉁이를 돌자 프리츠 중사는 벌써 헬튼의 팔에 잡혀 있더군요. 헬튼이 팔에 힘을 주자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헬튼이 미리 와 있었단 말이군. 그 한번으로 프리츠 중사가 죽었나?”
프롬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존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거짓말쟁이 같으니! 늑골 골절은 프리츠 중사의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단 말이다.’
볼은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 그랬었군. 헬튼이 죽인 거였어. 그런데 경비병에게 발각될 당시 어째서 헬튼은 없고 넌 프리츠 중사를 뜯어먹고 있었지?”
“그, 그건...”
프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인육을 먹은 건 변명할 수가 없었다. 날고기를 먹은 것만으로도 처벌감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 궁지를 벗어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헬튼을 악당으로 만들어야 했다.
“헬튼은 날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우리들 중 가장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프리츠 중사를 쓰레기 소각장으로 끌고 가 버려라... 우리들 중 싸움으로 헬튼의 상대가 될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죠. 난 헬튼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 프리츠 중사를 소각장으로 끌고 갔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프롬은 고개를 떨구고 더는 말을 못했다. 볼은 프롬이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말을 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프롬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꾸만 시체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프롬은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다. 잘못을 충분히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존은 이 가엾은 표정의 뒤에 숨어 있는 교활함과 잔혹함을 놓치지 않았다.
‘증거는 명확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다니... 제 동료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놈이니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존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존은 그 변화의 의미를 즉시 간파했다.
존은 취조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놈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요? 놈의 눈빛을 보십시오. 교활하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속죄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요.”
프롬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정말입니다! 난 프리츠 중사를 죽이지 않았어요!”
존은 경멸하는 눈으로 프롬을 노려보았다. 프롬은 고개를 떨구고서 난 죽이지 않았다는 말을 나직이 되풀이하면서 흐느꼈다.
“프롬. 잘 들었다. 네 진술을 참고로 해서 진상을 파헤치겠다. 나중에 헬튼과 대면할 때도 지금처럼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겠지?”
존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함장님!”
볼은 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프롬을 보면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존은 볼을 바짝 붙어 나오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함장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볼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중얼거렸다.
“헬튼... 언젠가 1호함의 엘리시온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 놈의 이름이 심심찮게 거론되었지. 아마 문셔틀 1,2,3,4호함을 통틀어 헬튼의 이름을 모르는 엘리시온은 없을 거야. 놈은 엘리시온 놈들의 우두머리야.”
취조실의 철문 옆엔 아직도 블론 대위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블론 대위!”
“Yes sir!”
블론 대위는 씩씩한 대답과 차려 자세를 취했다. 볼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존이 급히 끼여들었다.
“자, 잠깐! 프롬의 황당한 진술로 헬튼을 진범으로 몰려는 건 아니겠죠? 비디오 기록도 프롬이 범인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볼은 들은 척도 않고 블론 대위에게 명령했다.
“당장 군인들을 인솔하고 가서 헬튼을 체포해오게.”
“Yes sir!"
상명하복은 군인의 철칙이다. 블론 대위는 경례를 하고 즉시 자리를 떴다.
“엘리시온도 엄연히 제국의 시민입니다. 증거도 없이 체포하는 건 위법입니다, 함장님!”
볼은 존을 뒤돌아보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반문했다.
“증거? 명확하지 않나?
“프롬의 진술은 거짓입니다! 함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디가 거짓이라는 건가? 카메라의 기록은 프롬이 프리츠 중사를 미행했다는 사실만을 포착했을 뿐이네. 프롬의 진술은 카메라의 기록과 어긋나지 않아.”
존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프롬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진술이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군의관 한 명이 통로 한쪽에서 취조실로 재게 다가왔다. 그는 볼의 앞에 이르러 경례를 한 후 보고서를 내밀었다.
“시체 감식 결과 프리츠 중사의 사인이 밝혀졌습니다. 프리츠 중사의 늑골이 모두 부서졌고 그 중 두 개가 폐를 찔러 출혈이 발생했습니다만... 이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닙니다. 프리츠 중사의 사인은 독입니다.”
볼의 낯빛이 언뜻 변했다.
“독이라고?”
“예. 출혈독(出血毒)의 일종입니다. 살모사와 같은 독사에게서 볼 수 있는 독이죠. 독은 프리츠 중사의 경동맥 부위에 뚫린 이빨 자국으로부터 주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이 주입되기 전에 죽었다면, 독이 전신으로 퍼질 수 없었겠죠.”
존은 의외의 결과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짐작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내심 반색하면서 물었다.
“이빨 자국이라... 송곳니 같은 것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프롬의 입엔 송곳니가 두 개 있습니다. 평소엔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입천장 쪽으로 갈무리되지만 입을 벌리면 밖으로 삐쳐 나오죠. 독사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송곳니가 프리츠 중사의 목에 구멍을 뚫은 겁니다. 프롬의 송곳니에 연결된 독선(毒腺)에서 채취한 독과 프리츠 중사의 피에서 채취한 독의 성분이 동일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헬튼의 무죄는 입증되었다고 존은 생각했다.
“함장님. 이제 블론 대위에게 내린 명령을 취소하셔야...”
“귀관의 감식보고는 훌륭했네. 이만 돌아가게.”
볼은 군의관을 돌려보낸 후 존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프리츠 중사의 늑골을 부러뜨린 건 헬튼이었겠지.”
존의 입장에서 보면 볼은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즉시 반박했다.
“웬만한 엘리시온이면 그 정도의 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롬도 예외는 아닙니다. 프롬은 자신의 독 이빨로 프리츠 중사를 죽였으면서 헬튼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최소한 헬튼이 공범일 가능성은 충분하네. 헬튼을 체포해서 취조해야겠어.”
존은 답답했다. 볼은 지나친 월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존은 격앙된 어조로 항변했다.
“프롬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함장님. 그런 억지스런 심증만으로 헬튼을 취조한다면, 이건 명백한 위법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돌연 볼은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이곳의 최고 지휘자가 누구인가? 자넨 내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네! 알겠나, 부 함장 존 힐튼?”
볼과 존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불꽃 튀는 시간이 잠깐 흘러간 후, 존은 맥없이 대답했다.
“Yes sir..."
어깨를 늘어뜨리고 뒤돌아서는 존을 노려보면서 볼은 이를 악물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어.’
신류원의 안일한 판단은 그릇되었음이 드러났다.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은 이상, 이럴 경우에 대비해둔 방법을 철저히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이 참에 엘리시온들을 확실하게 억눌러 놓지 않으면 달이주계획은 처음부터 좌절될 것이다! 헬튼이 진범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대가가 어떤지 뼈저리게 보여주어야 해. 사소한 반발조차도 두 번 다시 꿈 꿀 수 없게끔... 헬튼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우려를 금치 못하며 통로를 터벅터벅 걷던 존은 문득 지구를 출발하기 전 볼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함장은 진작부터 엘리시온을 위험한 존재로 확신했다. 그는 극단적인 시각으로 엘리시온들을 바라보고 있어. 그는 헬튼을 프롬의 공범으로 묶어 처단함으로써 엘리시온들을 강압하려 하고 있다. 엘리시온들을 힘으로 억압하지 말 것. 함장은 이 수칙을 어기고 있다. 그는 편견으로 인해 공정성을 잊고 독단으로 치닫고 있어.’
억압은 곧 반발을 초래하기 마련. 존은 함장의 독단이 불러올 혼란이 두려웠다. 그는 두 번 세 번 심사숙고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부 함장에겐 함장의 독선을 제지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난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골이 지끈거린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다. 무엇하나 예전의 감각을 갖춘 것이 없다. 몽롱하던 의식이 점차 가닥을 잡으면서 프롬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은 금속 의자에 결박되어 있었다. 팔과 다리는 철제 수갑으로 단단히 채워졌고, 가슴 또한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문득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뇌리를 스친다.
‘그래... 프리츠. 그 녀석의 살을 뜯던 중이었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불현듯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끝장이다. 끝장이야.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그래! 분명한 건...
‘젠장! 나보다 먼저 프리츠를 공격한 건 헬튼이었어. 그 녀석이 주범이라고! 난 그저 시체를 먹었을 뿐이야!’
일의 선후나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란 그 어떤 감정이나 이성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프롬은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난 아냐! 헬튼이 죽였어! 난 죽은 고기를 먹었을 뿐이라고!”
“헬튼이라고...?”
철제문 상단에 난 작은 유리창 너머로 프롬의 상태를 지켜보던 볼의 눈빛이 번갯불처럼 빛났다. 그는 프롬이 감금된 취조실을 지키던 블론 대위에게 명령하여 문을 열고 존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난 프리츠 중사를 죽이지 않았어! 난 죽은 고기를 먹었을 뿐이야!”
프롬은 취조실의 철문이 열리고 볼과 존이 발을 들일 때까지 이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존은 이성을 잃은 프롬의 고함 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리츠 중사를 고기라니...’
프롬은 미쳐 있었다. 미치지 않았다면 음식이 풍족한 함 내에서 인간의 살을 뜯어먹는 상식 밖의 짓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프롬은 고함을 뚝 멈추었다. 그는 볼과 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이다. 프롬은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을 한 주제에 어처구니없게도...
볼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겠나, 프롬?”
“난 죽이지 않았어요, 함장님! 프리츠 중사를 죽인 건 헬튼이라고요!”
프롬은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볼은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고는 상대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음성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물었다.
“헬튼이 프리츠 중사를 죽인 후, 네가 프리츠 중사의 살점을 뜯어먹었다는 말이지?”
“그래요! 사실은! 아, 아니...”
헬튼이 죽인 줄 알았던 프리츠 중사가 아직 죽지 않은 바람에 자신이 이빨로 물어뜯었다는 말을 무심코 내뱉으려던 프롬은 급히 말을 삼켰다.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결국 살인자는 자신이 된다. 이걸 그대로 까발릴 수는 없다. 이성을 차리고, 어떻게 하든지 헬튼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야 해! 헬튼이 죽였다고 우기면, 어쩌면 사형만은 면할 수 있을 지도 몰라.
프롬이 염두를 굴리느라 대답을 머뭇거리자 볼은 더욱 부드러워진 어조로 물었다.
“좀 더 자세한 진술이 필요하다, 프롬. 헬튼이 어떻게 프리츠 중사를 죽였지?”
마침 프롬은 머릿속으로 합당한 변명을 조합했다.
“바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난 후, 난 프리츠 중사를 뒤따라갔습니다.”
“카메라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말이지?”
“예, 그래요. 카메라를 피하는 건 식은 죽 먹기죠. 그러고는 적당한 장소에서 프리츠 중사를 기습하여 보복을 하려고 했죠.”
“죽이려고 했나?”
“아, 아닙니다. 맹세코! 난 그저 날 때린 프리츠 중사에게 분풀이만 하려고 한 겁니다. 죽일 의사는 전혀 없었어요!”
“그래, 그렇겠지. 넌 프리츠 중사를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을 거야.”
볼의 호의적인 응수에 프롬은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난 기회를 포착하고 프리츠 중사가 통로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 재빨리 뒤따라가 덮쳤죠.”
“그 지점은 P24 통로였겠지.”
“그래요! 난 주먹으로 한 대쯤 후려치고는 욕설을 퍼부어 주려고 했죠. 정말 그 정도로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모퉁이를 돌자 프리츠 중사는 벌써 헬튼의 팔에 잡혀 있더군요. 헬튼이 팔에 힘을 주자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헬튼이 미리 와 있었단 말이군. 그 한번으로 프리츠 중사가 죽었나?”
프롬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존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거짓말쟁이 같으니! 늑골 골절은 프리츠 중사의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단 말이다.’
볼은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 그랬었군. 헬튼이 죽인 거였어. 그런데 경비병에게 발각될 당시 어째서 헬튼은 없고 넌 프리츠 중사를 뜯어먹고 있었지?”
“그, 그건...”
프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인육을 먹은 건 변명할 수가 없었다. 날고기를 먹은 것만으로도 처벌감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 궁지를 벗어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헬튼을 악당으로 만들어야 했다.
“헬튼은 날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우리들 중 가장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프리츠 중사를 쓰레기 소각장으로 끌고 가 버려라... 우리들 중 싸움으로 헬튼의 상대가 될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죠. 난 헬튼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 프리츠 중사를 소각장으로 끌고 갔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프롬은 고개를 떨구고 더는 말을 못했다. 볼은 프롬이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말을 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프롬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꾸만 시체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프롬은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 애썼다. 잘못을 충분히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존은 이 가엾은 표정의 뒤에 숨어 있는 교활함과 잔혹함을 놓치지 않았다.
‘증거는 명확하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다니... 제 동료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놈이니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존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존은 그 변화의 의미를 즉시 간파했다.
존은 취조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놈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요? 놈의 눈빛을 보십시오. 교활하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속죄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요.”
프롬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정말입니다! 난 프리츠 중사를 죽이지 않았어요!”
존은 경멸하는 눈으로 프롬을 노려보았다. 프롬은 고개를 떨구고서 난 죽이지 않았다는 말을 나직이 되풀이하면서 흐느꼈다.
“프롬. 잘 들었다. 네 진술을 참고로 해서 진상을 파헤치겠다. 나중에 헬튼과 대면할 때도 지금처럼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겠지?”
존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함장님!”
볼은 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프롬을 보면서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존은 볼을 바짝 붙어 나오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함장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볼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중얼거렸다.
“헬튼... 언젠가 1호함의 엘리시온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 놈의 이름이 심심찮게 거론되었지. 아마 문셔틀 1,2,3,4호함을 통틀어 헬튼의 이름을 모르는 엘리시온은 없을 거야. 놈은 엘리시온 놈들의 우두머리야.”
취조실의 철문 옆엔 아직도 블론 대위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블론 대위!”
“Yes sir!”
블론 대위는 씩씩한 대답과 차려 자세를 취했다. 볼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존이 급히 끼여들었다.
“자, 잠깐! 프롬의 황당한 진술로 헬튼을 진범으로 몰려는 건 아니겠죠? 비디오 기록도 프롬이 범인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볼은 들은 척도 않고 블론 대위에게 명령했다.
“당장 군인들을 인솔하고 가서 헬튼을 체포해오게.”
“Yes sir!"
상명하복은 군인의 철칙이다. 블론 대위는 경례를 하고 즉시 자리를 떴다.
“엘리시온도 엄연히 제국의 시민입니다. 증거도 없이 체포하는 건 위법입니다, 함장님!”
볼은 존을 뒤돌아보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반문했다.
“증거? 명확하지 않나?
“프롬의 진술은 거짓입니다! 함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디가 거짓이라는 건가? 카메라의 기록은 프롬이 프리츠 중사를 미행했다는 사실만을 포착했을 뿐이네. 프롬의 진술은 카메라의 기록과 어긋나지 않아.”
존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프롬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진술이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이때였다. 군의관 한 명이 통로 한쪽에서 취조실로 재게 다가왔다. 그는 볼의 앞에 이르러 경례를 한 후 보고서를 내밀었다.
“시체 감식 결과 프리츠 중사의 사인이 밝혀졌습니다. 프리츠 중사의 늑골이 모두 부서졌고 그 중 두 개가 폐를 찔러 출혈이 발생했습니다만... 이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닙니다. 프리츠 중사의 사인은 독입니다.”
볼의 낯빛이 언뜻 변했다.
“독이라고?”
“예. 출혈독(出血毒)의 일종입니다. 살모사와 같은 독사에게서 볼 수 있는 독이죠. 독은 프리츠 중사의 경동맥 부위에 뚫린 이빨 자국으로부터 주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이 주입되기 전에 죽었다면, 독이 전신으로 퍼질 수 없었겠죠.”
존은 의외의 결과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짐작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내심 반색하면서 물었다.
“이빨 자국이라... 송곳니 같은 것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프롬의 입엔 송곳니가 두 개 있습니다. 평소엔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입천장 쪽으로 갈무리되지만 입을 벌리면 밖으로 삐쳐 나오죠. 독사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송곳니가 프리츠 중사의 목에 구멍을 뚫은 겁니다. 프롬의 송곳니에 연결된 독선(毒腺)에서 채취한 독과 프리츠 중사의 피에서 채취한 독의 성분이 동일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헬튼의 무죄는 입증되었다고 존은 생각했다.
“함장님. 이제 블론 대위에게 내린 명령을 취소하셔야...”
“귀관의 감식보고는 훌륭했네. 이만 돌아가게.”
볼은 군의관을 돌려보낸 후 존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프리츠 중사의 늑골을 부러뜨린 건 헬튼이었겠지.”
존의 입장에서 보면 볼은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즉시 반박했다.
“웬만한 엘리시온이면 그 정도의 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롬도 예외는 아닙니다. 프롬은 자신의 독 이빨로 프리츠 중사를 죽였으면서 헬튼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최소한 헬튼이 공범일 가능성은 충분하네. 헬튼을 체포해서 취조해야겠어.”
존은 답답했다. 볼은 지나친 월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존은 격앙된 어조로 항변했다.
“프롬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함장님. 그런 억지스런 심증만으로 헬튼을 취조한다면, 이건 명백한 위법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돌연 볼은 위압적으로 소리쳤다.
“이곳의 최고 지휘자가 누구인가? 자넨 내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네! 알겠나, 부 함장 존 힐튼?”
볼과 존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불꽃 튀는 시간이 잠깐 흘러간 후, 존은 맥없이 대답했다.
“Yes sir..."
어깨를 늘어뜨리고 뒤돌아서는 존을 노려보면서 볼은 이를 악물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어.’
신류원의 안일한 판단은 그릇되었음이 드러났다.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은 이상, 이럴 경우에 대비해둔 방법을 철저히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이 참에 엘리시온들을 확실하게 억눌러 놓지 않으면 달이주계획은 처음부터 좌절될 것이다! 헬튼이 진범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대가가 어떤지 뼈저리게 보여주어야 해. 사소한 반발조차도 두 번 다시 꿈 꿀 수 없게끔... 헬튼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우려를 금치 못하며 통로를 터벅터벅 걷던 존은 문득 지구를 출발하기 전 볼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함장은 진작부터 엘리시온을 위험한 존재로 확신했다. 그는 극단적인 시각으로 엘리시온들을 바라보고 있어. 그는 헬튼을 프롬의 공범으로 묶어 처단함으로써 엘리시온들을 강압하려 하고 있다. 엘리시온들을 힘으로 억압하지 말 것. 함장은 이 수칙을 어기고 있다. 그는 편견으로 인해 공정성을 잊고 독단으로 치닫고 있어.’
억압은 곧 반발을 초래하기 마련. 존은 함장의 독단이 불러올 혼란이 두려웠다. 그는 두 번 세 번 심사숙고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부 함장에겐 함장의 독선을 제지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난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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