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흔들리는 지구_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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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0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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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너희들 그 소문 아니?”
“무슨 얘긴데?”
“황태손 전하께서 사실은... 폐하의 친 핏줄이 아니라는 거...”
“어머! 어머! 그게 무슨 소리야?”
“황태손 전하께선 인공자궁에서 자라나셨는데...”
“그건 알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니니? 전하의 모친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 그분의 뱃속엔 삼 개월 된 아기씨가 있었지. 신류원의 아이헨도르프 박사가 그 아기씨를 인공자궁에서 양육하여 태어나게 했는데... 그 아기씨가 바로 황태손 전하가 아니니?”
“바보 같이.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란 말야. 이건 절대 말해선 안 되는 비밀인데... 전하의 모친이 돌아가신 건 병환이 아니라 사고 때문이었데.”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당시 전하의 모친께선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곳은 성녀 세린이 잠든 성스런 사원. 장미가 만발한 정원 한 구석에 다섯 명의 시녀들이 모여 소곤거렸다. 그녀들은 행여 누가 들을 새라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지만, 잔잔한 바람이 그녀들의 은밀한 속삭임을 정원과 인접한 담장의 그늘진 곳으로 날라다 주었다. 그러고 그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은 천둥 같은 충격이 되어 그늘 속에 몸을 숨긴 한 소년의 의식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내가, 내가... 불륜의 씨앗이라고?”
소년... 카나이마 1세의 유일한 핏줄로서 만인의 존경을 받는 황태손 셰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거짓말이다. 그럴 수가 없다. 그래, 거짓말이야. 발칙하게도... 저 시녀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셰닐은 화가 났다. 저 괘씸한 계집들을 혼내주리라. 그가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을 때다.
“그 비밀의 열쇠는 아이헨도르프 박사가 쥐고 있대... 황태손 전하와 피터 대령의 유전자 감식 데이터가...”
“그게 정말일까?”
“날 의심하는 거니? 아까... 경제부의 사람들이 몰래 나누는 얘길 똑똑히 들었단 말야. 공공연한 비밀이래.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황태손 전하의 얼굴이 당시 총살형을 달했던 스톤 대령을 쏙 빼어 닮았다던 걸...”
시녀들에게 뛰쳐나가려던 셰닐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그늘 깊숙이 움츠렸다.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그의 나이 열 다섯. 아직은 설익은 나이였다.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전신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방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항상 예사롭지 않았던 까닭을. 그 복잡 미묘하던 눈길이야말로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불륜에 대한 경멸과 조소였던 것이다.
‘날 비웃었던 거야. 모두가 날 속였어...’
아이헨도르프, 키튼 경, 그리고 수시로 황궁을 들락거리며 친근한 척 말을 걸던 관직자들... 그 가증스런 얼굴들이 명멸하면서 날카로운 웃음으로 셰닐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실까? 만약 할아버지마저 날 불륜의 씨앗으로 여긴다면... 난 어떻게 될까?’
두렵다. 두려움이 봇물처럼 밀려와 그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정녕 끔찍한 일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날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황태손이라는 신분도, 신하들의 공경도, 안락한 궁중의 생활도...
문득 싸늘한 감촉이 피부를 뚫고 들어와 셰닐의 의식을 퍼뜩 일깨운다.
‘언제... 이곳으로 온 걸까?’
그는 차가운 대리석 기둥에 몸을 기대고서 주저앉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은 성스런 사원의 본당. 바로 성녀 세린이 오랜 잠에 든 성지였다. 또한 셰닐이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홀로 시간을 보내던 장소이기도 했다.
"세린..."
셰닐은 제단 위의 투명한 유리 캡슐 속에 잠든 여인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쓸쓸히 웃었다.
“비로소 우린... 같은 처지가 되었군요. 당신이 세상사람들로부터 버려진 것처럼 나도 버려졌어요. 당신은 잠들어 있고 난 이렇게 깨어있지만...”
어째서 일까?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이 여인을 보면,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한 위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이 날 경원했던 걸 의식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 여인처럼 외톨박이가 된 날 자각하고 있었던 걸까?
셰닐은 흐느적거리면서 제단을 올랐다.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위로를 받고 싶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하리라. 그들은 날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어쩌면... 할아버지마저 날 눈엣가시처럼 생각하실 지도 모른다. 난 이제 어떡해야 하는가?
셰닐은 넋을 놓은 채 성녀가 잠든 캡슐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성녀라고 했지요? 정녕 당신이 신의 은총을 받았다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면... 내게 말해줄 수 없습니까? 내가 진정 불륜의 대가로 태어났는지...”
성녀 세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하긴 대답을 바라고 한 독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닐은 따스한 기운이 가슴에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셰닐은 자신의 얼굴을 성녀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그러고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속삭였다.
“당신은 고귀한 여인입니다. 마치 나의 어머니 같아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온화한 행복이 온몸을 적신다. 이 순간 셰닐의 의식 속엔 시녀들이 불륜 운운하던 모친의 모습은 끼여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여인들의 재잘거림이 그 포근한 행복감을 일순간에 날려버렸다. 셰닐의 마음에 일격을 날렸던 그 시녀들이 본당 입구에 언뜻 내비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찰나간이었건만, 셰닐의 환상은 박살이 나버렸다. 불현듯 캡슐의 냉기가 바늘처럼 손끝을 찌른다. 그 날카로움이 시녀들의 속삭임이 되어 뇌리를 휘젓는다.

- ...총살당했던 스톤 대령을 쏙 빼어 닮았다던 걸...

셰닐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한겨울의 찬바람 같은 한기가 살갗을 훑고 지나간다.
“내 얼굴이...
셰닐은 두 손으로 얼굴을 와락 감싸쥐었다. 우윳빛처럼 뽀얗고 매끄럽던 피부가 어느새 독사의 비늘처럼 거칠고 흉측하게 변한 듯하다. 주체할 수 없도록 전신 떨린다. 이 얼굴이 혐오스럽다. 이 징그럽고 끔찍한 얼굴이 바로 내 것이란 말인가?
“으으으! 내 얼굴이...!”
셰닐은 얼굴을 마구 할퀴었다. 이 끔찍한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싶다. 고운 얼굴이 손톱에 긁혀 피가 흐른다. 불륜의 피다! 피부가 갈라지는 고통이 더욱 역겹게만 다가온다.
셰닐은 귀를 가리고 머리를 마구 내저었다.
‘아냐... 아냐! 거짓말이다!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있어. 그따위 더러운 여인이... 어떻게 나의 모친이 될 수 있는가?’
시녀들은 멀리 가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웃음소리와 속삭임은 떠날 줄을 모르고 셰닐을 괴롭혔다.
‘난 황태손이다. 성스런 핏줄을 타고 난 황태손이야. 나의 모친이라면 마땅히 이 여인과 같아야 한다. 이 여인처럼 고귀하고 성스러워야 해!’
셰닐은 성녀가 잠든 냉동캡슐을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한참을 흐느끼고 난 후, 그의 눈에선 독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더러운 소릴 입에 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모두 죽여버리겠어! 아이헨도르프! 관속에 들어가 썩을 날이 멀지 않는 늙은이 따위가... 감히 나의 정통성에 때를 묻히려 들다니.”
셰닐의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활화산 같은 복수심이, 모두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다.
“나의 명예를 더럽힐 오점 따위는 이 세상에 남길 수 없어. 죽여버리겠어! 날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겠어! 아이헨도르프! 그 늙은이가 그따위로 조작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죽여버리겠어. 그 증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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