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흔들리는 지구_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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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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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일 주일 후. 중국 지구의 밤.
여기는 중국 지구의 작은 도시 대동(大同)하고도 외곽의 빈민가. 엘리시온들의 가옥이 밀집한 이곳은 아비규환의 끔찍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처에서 광선이 번쩍거리고 그때마다 커다란 폭음과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타올랐다. 악마 같은 불꽃이 사방에 넘실대면서 모두의 숨통을 조여들었다. 건물은 무너지고 곳곳에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겼다.
케이튼은 숨을 헐떡이며 무너진 건물 틈으로 숨어들었다. 숨쉴 틈 없이 기침이 튀어나오고, 눈에선 눈물이 내처럼 흘렀다. 눈을 따갑게 쑤시는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투... 주루...”
눈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아들을 두고 도망치는 아비의 심정을 그 무엇으로 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케이튼은 귀를 가리고 울부짖었다. 수없이 짓밟히며 죽어 가는 남녀노소의 비명, 비명들... 그것은 괴물이었다. 인정도 자비도 없이 오직 살육과 파괴만을 일삼는 괴물이었다. 그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은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을 토하며 동료들과 동료들의 아내와 그 자식들을 짓밟고 태워 죽였다. 그러고 괴물의 거대한 발에 눌려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뇌수를 뿌리며 죽어버린 비투... 오렌지 빛 살인 광선에 하반신이 떨어져 나간 채 애처로운 눈으로 아비를 올려다보며 숨을 거둔 주루...
“비투... 주루... 이 아비를 용서하거라.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고... 혼자 살겠다고 도주한 이 비정한 아비를 용서하거라...”
마음을 굳게 다잡으려 애를 쓰지만 악 다문 이빨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쓰라린 신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입 언저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그 떨림은 곧이어 턱과 어깨와 사지로 번져나간다.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이 분노를 어찌해야 하는가...
콰앙!
돌연 거대한 폭음과 더불어 케이튼이 숨은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어 수십 수 백 개의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가까워지면서 누군가가 다급히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진압군이다! 괴물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어!”
“동쪽으로 도망가라! 이 지옥 같은 도시를 빠져나가야 해!”
“동쪽으로 도망가자!”
어른들의 재촉하는 소리, 여자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 소리가 난무하면서 건물 근처로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금방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천지를 뒤집는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쿵! 쿵!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분노보다는 일단 목숨을 연명하는 게 중요했다. 살아 있어야만 오늘의 참상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케이튼은 건물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숨어 몸을 바짝 웅크렸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케이튼이 숨은 건물과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대여섯 채의 건물이 산산조각 나고,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고 몇 십 명이나 되는지 모를 비명 소리와 아우성이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날아갔다.
케이튼은 하마터면 머리가 박살날 뻔했다. 건물의 파편들 중 일부가 케이튼이 숨은 건물의 창과 허물어진 벽을 부수고 날아들었던 것이다.
방금 전의 폭발은 괴물들의 짓이었다. 엘리시온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괴물들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캐터필러로 움직이는 전차형 로봇이었다. 놈은 포가 달린 커다란 두 팔을 신속하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폭탄을 쏘아 엘리시온들이 밀집한 건물을 사정없이 부수며 전진했다. 또 하나는 갑옷을 두른 공룡처럼 생긴 거대한 로봇이었다. 놈은 거대한 발로 엘리시온들을 짓밟았고, 몸통에 머리 대신 달린 레이저 포로 광선을 쏘아 엘리시온들을 태우고 쇠와 건물을 녹였다. 상대가 레이저 건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련만, 이 끔찍한 괴물들 앞에서 엘리시온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케이튼이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죽이는 사이 또다시 폭탄이 터지는 굉음이 울렸다. 그러고 수학 공식처럼 수십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이 한 발의 폭탄에 몇 명이나 되는 동료들이 죽어갈 것인가? 내 아들 비투와 주루처럼...’
케이튼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런 몸부림도 곧 끝장을 볼 처지였다. 케이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이 이 건물로 곧장 다가오고 있음을. 이제 이 건물도 괴물이 쏟아내는 폭탄과 광선에 박살이 날 것이다. 그러고 자신의 몸도 건물의 잔해와 같이 흩어지리라. 먼저 죽어간 아들처럼...
케이튼은 문득 뒤통수가 환하게 밝아지는 걸 느꼈다. 괴물들이 쏘아내는 서치라이트였다. 이제 이 건물이 괴물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케이튼은 고개를 들었다. 과연 괴물들이 건물의 몇 십 미터 밖에서 직진해오고 있었다. 불길한 직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케이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끝이다. 이제 먼저 간 두 아들 뒤를 따르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친 비겁한 아비에게 내리는 하늘의 벌인 것이다. 케이튼은 가만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돌연 캐터필러가 구르는 소리와 괴물의 발자국 소리가 한쪽으로 꺾이면서 멀어지고 있었다. 케이튼은 건물의 허물어진 벽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괴물들은 조금 전 엘리시온들이 도주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진격하고 있었다.
‘겨우 살았는가...’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안도감에 케이튼은 맥이 풀렸다. 그러나 그가 바닥에 주저 않기도 전에 상황은 다시금 비관적으로 변해버렸다. 레이저 건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건물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주변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라!”
놈들 중 몇몇이 케이튼이 숨어든 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이튼은 건물 입구의 반대편으로 재빨리 몸을 굴렸다. 그러고는 허물어져 형체가 희미한 벽난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너덜거리던 건물의 문짝을 거칠게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문짝이 박살나면서 병사 두 명이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들어왔다.
손전등으로 입구 주변의 허물어진 벽을 비추던 한 놈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재빨리 동료에게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방금 여기에 한 놈이 숨어 있었어!”
그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동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과 일분 전이로군.”
순간 벽난로 속에 숨어 있던 케이튼은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병사들은 이 건물에 숨은 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삭였지만, 케이튼이 인간의 열 배에 달하는 청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케이튼은 숨을 죽이고 몸의 일부라도 벽난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바짝 움츠렸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눈에 착용한 보안경은 인체가 이분 전까지 발산한 열을 감지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두 병사는 잔열(殘熱)의 흐름을 쫓았다. 잔열은 바닥에 깔리는 듯하다가 곧장 벽난로 속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주고받은 후 벽난로 주위의 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번쩍!
레이저 건이 두 줄기 광선을 뿜었다. 두 줄기 광선은 각각 벽난로의 좌우를 관통했다. 병사들은 천천히 레이저 건을 움직여 원을 그렸다. 조각을 하듯 벽난로를 도려냄으로써 그 뒤에 숨은 놈을 토막낼 작정이었다.
케이튼은 두 줄기의 광선이 벽난로의 벽을 관통하여 몸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생존의 본능을 따라 벽난로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시온은 대부분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엘리시온들 중에서도 특히 체력이 뛰어난 케이튼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빨랐다.
“어?”
이 돌발적인 상황에 두 병사는 놀란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미처 반사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케이튼은 커다란 주먹으로 한 녀석의 턱을 후려쳤다.
뻑!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육중한 몸이 공중으로 솟았다. 놈은 두 길 높이나 되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가 곧장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걸로 끝이었다. 놈은 천장에 부딪치기도 전에 케이튼의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안면 골이 함몰하고 목뼈가 부러져 즉사한 상태였다.
나머지 한 녀석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이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 사이 케이튼은 녀석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우드득!
녀석의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는 감촉이 주먹을 통해 느껴졌다.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가슴을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부러진 뼈가 폐를 찌른 듯 그는 입에서 피를 게워내며 몸부림쳤다.
피를 보자 살고자하는 본능은 아들을 잃은 복수심과 보태어져 살육의 본능으로 이어졌다. 케이튼은 나직이 신음하는 병사의 머리를 짓밟았다. 인간들의 괴물이 비투를 짓밟은 것처럼... 그 병사는 머리가 박살나 뇌수를 뿌리며 죽고 말았다.
이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케이튼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후련함은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밀려 금방 사라졌다.
‘괴물들이 도시 밖으로 도주하는 동료들을 쫓아갔다.’
그렇다면 도주할 방향은 오직 한 곳, 인간들이 거주하는 도심이었다. 진압군의 목적은 엘리시온이었으므로 진압군의 괴물들이 인간의 거주 공간에 들어갈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케이튼은 두 녀석의 시체를 쉽게 발견되지 않게끔 한쪽 구석에 치워두고 밖을 살폈다. 진압군의 대부분은 동쪽으로 몰려간 후라, 건물 주변엔 병사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힘이 넘쳐나는 근육질의 다리와 어둠에 의지하면, 저들의 눈길을 피할 수도 있을 법했다.
케이튼은 망설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무전으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 이 건물 안의 두 녀석이 죽은 사실이 발각될 것이었다. 케이튼은 주변의 모든 병사들이 여러 건물들 안으로 자취를 감춘 틈을 포착하여 재빨리 뛰쳐나왔다. 방향은 서쪽! 인간들의 거주 공간이었다.
케이튼의 질주는 네 다리 달린 짐승처럼 빨랐다. 어둠과 건물들의 벽에 몸을 숨기며 바람처럼 달리는 그를 발견하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서쪽으로 수 백 미터를 나가자 완파된 건물들의 잔해만이 깔린 지역이 나타났다. 진압군의 괴물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취였다.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잔해 사이사이로 잘려나간 팔다리와 머리, 그리고 불에 타다만 살점들이 이 참혹한 현장을 수놓고 있었다. 이 어딘가에 비투와 주루의 시체도 있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아들딸들이여! 오늘의 일은 죽어서도 잊지 않겠노라. 반드시... 반드시 오늘의 복수를 하겠노라!’
케이튼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도주했다.
잔해가 깔린 지역을 가까스로 벗어날 즈음 좌우로 숲이 길게 늘어선 도로가 나타났다. 엘리시온과 인간의 거주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지역이었다.
도시의 중심부와 외곽은 이 경계지역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분리되었다. 엘리시온들의 집이 대부분 초라한 단층의 석조 건물인데 비해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다채로운 색상의 특수 유리로 지어 올린 수십 층의 빌딩과 호화로운 정원에 둘러싸인 단층 혹은 이층의 가옥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대조적인 건물들이야말로 인간과 엘리시온들 간의 빈부격차의 상징인 것이다.
케이튼은 숲을 지나 도로를 건넜다. 그리고 다시 도로와 인간의 거주지역 사이의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숲의 어둠 속에서 한 병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와 케이튼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이봐! 이제 대충 정리된 것 같군.”
케이튼과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케이튼은 재빨리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다른 병사가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냐! 저기 한 녀석이 꿈틀거리는 걸.”
케이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병사 두 명이 바닥을 들쑤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은 보안경의 기능에 의지하여 야간에도 대낮처럼 볼 수 있었지만, 케이튼은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시력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움직임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처음 소리친 병사가 나중에 응답한 병사에게 다가가면서 중얼거렸다.
“어? 살아 있는 놈이 있었군.”
나중에 응답한 병사가 바닥에 쓰러진 거무스름한 물체를 발로 툭툭 차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지? 끌고 갈까?”
“귀찮은 짓을 왜 하나! 이깟 짐승 같은 놈은 그냥 죽여버리지.”
놈들은 바닥의 거무스름한 물체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거무스름한 물체는 미미하게 꿈틀거리면서 신음했다. 그러나 두 중기의 광선이 번쩍이자 순간 신음은 멎었고 꿈틀거림도 멈추었다.
‘잔혹한 놈들...!’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번쩍거린다. 이왕 살인을 한 몸이다. 인정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살인마들을 응징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케이튼의 몸이 움직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물적인 체력을 지닌 그였다. 나무에서 튀어나와 십여 미터 떨어진 놈들을 덮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두 병사가 케이튼의 존재를 깨닫고 총구를 돌리는 순간, 케이튼의 두 주먹이 놈들의 턱과 가슴을 강타했다. 두 병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이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케이튼은 바닥에 쓰러진 두 놈을 차례로 걷어찼다.
“죽어라, 악마 같은 놈들! 죽어버려라!”
케이튼은 쌓이고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풀 듯 고함치며 두 놈을 마구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튼의 광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케이튼이 겨우 이성을 차릴 즈음, 두 놈은 피범벅이 되어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는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으면서 본래의 처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위험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병사들은 아직 이 주위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들키기 전에 인간의 거주 지역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케이튼은 두 병사의 시체를 가까운 나무 아래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주변의 나뭇잎을 긁어모아 두 병사의 몸을 덮었다. 케이튼이 두 병사의 시신을 완전히 은폐시킨 다음 도시 중심부 쪽으로 달려가려 할 때다.
번쩍!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는 듯하더니 오렌지 빛 광선이 케이튼의 곁을 지나 나무를 꿰뚫는다. 케이튼은 소스라치게 놀라 근처의 나무로 몸을 숨겼다. 어깨가 화끈거리고 살 타는 냄새가 피뜩 코를 찌르고 사라진다.
‘어깨를 스쳤구나!’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아무리 몸이 빠른들 레이저 광선을 보고서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방의 서툰 사격 솜씨에 감사하면서 케이튼은 귀를 곤두세워 발자국 소리를 찾았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걸음을 멈추고 나의 동정을 살피는 걸까?’
케이튼이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쿵! 돌연 케이튼이 몸을 기댄 나무가 밑동부터 흔들렸다. 케이튼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케이튼이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시커먼 물체 하나가 달려든다. 케이튼은 엉겁결에 발을 들어 놈을 걷어찼다. 놈이 가슴을 맞고 멈칫거린다. 그 사이 케이튼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놈의 가슴을 후려쳤다.
쾅! 마치 철판을 후려친 듯한 소리가 난다. 주먹을 통해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든다.
케이튼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놈이 바짝 따라붙으며 주먹을 날린다. 번개같은 속도다. 케이튼은 가까스로 놈의 주먹을 피했지만,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음이 고막을 찔렀다.
케이튼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공포를 느꼈다. 놈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놈의 주먹을 한 대만 맞는다면,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를 지닌 케이튼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간 조금 전처럼 광선 공격을 받을 것이었다.
케이튼은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상대방은 얼굴을 절반쯤 가린 헬멧을 쓴 병사였다. 케이튼은 상대의 몸을 껴안고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놈도 두 팔로 케이튼을 와락 껴안았다. 서로가 팔을 엇갈린 채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곧, 케이튼은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의 힘이 자신보다 터무니없이 강했던 것이다.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엘리시온들 중에서도 이처럼 강한 힘을 가진 자는 드물었다.
우드득! 상대가 조여드는 힘을 이기지 못해 갈비뼈가 비명을 지른다. 숨이 턱 막힌다. 상대방의 몸통을 죄던 케이튼의 팔이 무기력해지면서 풀린다. 그에 따라 상대방의 죄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뜩해진다.
‘이렇게 죽는 건가...’
자신의 최후를 실감하면서 케이튼이 절망할 때다. 쿵! 상대방의 몸이 한 차례 크게 울리는가 싶더니 케이튼의 몸통을 껴안은 두 팔이 스르르 풀렸다.
겨우 숨통이 트여 기침하는 케이튼의 시야에 희끗희끗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그림자는 바람처럼 움직여 케이튼을 공격했던 병사와 엇갈리면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 채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병사의 덩치는 케이튼 못지 않게 우람했다. 반면 하얀 그림자는 키가 케이튼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고, 몸은 앙상하기까지 했다. 케이튼은 그가 하얀 옷에 수염을 기른 육순 가량의 왜소한 사내라는 걸 알아보았다.
일순 커다란 병사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맥없이 쓰러졌다.
“위험한 순간이었네.”
하얀 옷의 사내는 소매를 털면서 케이튼에게 다가왔다.
케이튼은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같은 인간인 병사를 죽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인간이다! 엘리시온의 적이자 증오의 상징인 인간인 것이다!
케이튼은 적개심이 끓어올라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어렵잖게 슬쩍 몸을 틀어 케이튼의 주먹을 흘려버렸다. 케이튼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며 팔을 활짝 벌렸다. 왜소한 상대를 붙잡아 내팽개칠 생각이었는데, 그에 앞서 사내가 나직이 호통했다.
“목숨을 구해주었더니 오히려 죽이려드는가!”
케이튼은 멈칫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상대방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노려보기만 할 뿐인데, 무형의 힘이 케이튼의 팔다리를 꼼짝하지 못하게끔 억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케이튼이 혼란스러워하는데, 노인이 싱긋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난 호릉(胡綾)이라고 하네.”
순간 케이튼은 온몸을 짓누르던 무형의 힘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는 얼떨떨하여 저도 모르게 호릉의 손을 잡았다.
“나, 난 케이튼이오.”
“여긴 자네들이 침입하지 못하게끔 진압군들과 안드로이드(Android)들이 지키고 있네.”
“안드로이드? 이 놈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란 말이오?”
“혈랑(血狼)이라고 불리는 특수부대의 전투로봇이지. 겉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수십 마력의 힘에 몸에서 레이저 광선을 뿜는 놈들이야. 일단 놈의 시야에 걸리면 도망갈 수 없어. 인간이 남긴 체온을 감지하면서 추적하니까. 이놈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이렇게 박살 낼 수밖에 없지.”
“박살이라고?”
케이튼은 고개를 기웃하며 안드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안드로이드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다.
케이튼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호릉은 희미하게 웃었다.
“속을 부수었네. 예부터 내려오던 무술이라는 것이지.”
호릉은 케이튼의 어깨를 툭 지면서 말했다.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와 수 백 명의 병사들이 숲을 수색하고 있네. 여기에 있으면 죽고 말아. 날 따라오게.”
“어째서 날... 도와주는 것이오?”
머뭇머뭇 묻는 케이튼의 얼굴엔 의아함과 의심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자넨 인간들을 증오하고 있군.”
“내 아들과 아내가... 그리고 수많은 동료들이 무참히 죽었소. 바로 당신과 같은 인간에게 말이오.”
호릉은 침울하게 말했다.
“애석한 일이네. 왕푸친은 제 욕심에 눈이 멀었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백성들을 도탄으로 몰고 가고 있지. 같은 인간으로서... 난 자네들에게 오직 미안함 마음뿐일세.”
“그런 말로써 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호릉은 케이튼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면서 탄식했다.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면 이대로 남게나. 하지만 모든 인간이 똑 같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호릉은 케이튼이 따라오든 말든 등을 돌렸다.
케이튼은 망설였다. 이대로 호릉을 따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따라간다면 굴욕이었다. 그렇다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호릉의 뒷모습이 거의 사라질 때까지 갈등하던 케이튼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호릉을 믿는다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서 복수하기 위하여 힘겹게 발을 떼었다.
일 주일 후. 중국 지구의 밤.
여기는 중국 지구의 작은 도시 대동(大同)하고도 외곽의 빈민가. 엘리시온들의 가옥이 밀집한 이곳은 아비규환의 끔찍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처에서 광선이 번쩍거리고 그때마다 커다란 폭음과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타올랐다. 악마 같은 불꽃이 사방에 넘실대면서 모두의 숨통을 조여들었다. 건물은 무너지고 곳곳에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겼다.
케이튼은 숨을 헐떡이며 무너진 건물 틈으로 숨어들었다. 숨쉴 틈 없이 기침이 튀어나오고, 눈에선 눈물이 내처럼 흘렀다. 눈을 따갑게 쑤시는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투... 주루...”
눈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아들을 두고 도망치는 아비의 심정을 그 무엇으로 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케이튼은 귀를 가리고 울부짖었다. 수없이 짓밟히며 죽어 가는 남녀노소의 비명, 비명들... 그것은 괴물이었다. 인정도 자비도 없이 오직 살육과 파괴만을 일삼는 괴물이었다. 그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은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을 토하며 동료들과 동료들의 아내와 그 자식들을 짓밟고 태워 죽였다. 그러고 괴물의 거대한 발에 눌려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뇌수를 뿌리며 죽어버린 비투... 오렌지 빛 살인 광선에 하반신이 떨어져 나간 채 애처로운 눈으로 아비를 올려다보며 숨을 거둔 주루...
“비투... 주루... 이 아비를 용서하거라.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고... 혼자 살겠다고 도주한 이 비정한 아비를 용서하거라...”
마음을 굳게 다잡으려 애를 쓰지만 악 다문 이빨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쓰라린 신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입 언저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그 떨림은 곧이어 턱과 어깨와 사지로 번져나간다.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이 분노를 어찌해야 하는가...
콰앙!
돌연 거대한 폭음과 더불어 케이튼이 숨은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어 수십 수 백 개의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가까워지면서 누군가가 다급히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진압군이다! 괴물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어!”
“동쪽으로 도망가라! 이 지옥 같은 도시를 빠져나가야 해!”
“동쪽으로 도망가자!”
어른들의 재촉하는 소리, 여자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 소리가 난무하면서 건물 근처로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금방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어 천지를 뒤집는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쿵! 쿵!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분노보다는 일단 목숨을 연명하는 게 중요했다. 살아 있어야만 오늘의 참상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케이튼은 건물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숨어 몸을 바짝 웅크렸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케이튼이 숨은 건물과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대여섯 채의 건물이 산산조각 나고, 그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고 몇 십 명이나 되는지 모를 비명 소리와 아우성이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날아갔다.
케이튼은 하마터면 머리가 박살날 뻔했다. 건물의 파편들 중 일부가 케이튼이 숨은 건물의 창과 허물어진 벽을 부수고 날아들었던 것이다.
방금 전의 폭발은 괴물들의 짓이었다. 엘리시온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괴물들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캐터필러로 움직이는 전차형 로봇이었다. 놈은 포가 달린 커다란 두 팔을 신속하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폭탄을 쏘아 엘리시온들이 밀집한 건물을 사정없이 부수며 전진했다. 또 하나는 갑옷을 두른 공룡처럼 생긴 거대한 로봇이었다. 놈은 거대한 발로 엘리시온들을 짓밟았고, 몸통에 머리 대신 달린 레이저 포로 광선을 쏘아 엘리시온들을 태우고 쇠와 건물을 녹였다. 상대가 레이저 건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련만, 이 끔찍한 괴물들 앞에서 엘리시온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케이튼이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죽이는 사이 또다시 폭탄이 터지는 굉음이 울렸다. 그러고 수학 공식처럼 수십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이 한 발의 폭탄에 몇 명이나 되는 동료들이 죽어갈 것인가? 내 아들 비투와 주루처럼...’
케이튼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런 몸부림도 곧 끝장을 볼 처지였다. 케이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이 이 건물로 곧장 다가오고 있음을. 이제 이 건물도 괴물이 쏟아내는 폭탄과 광선에 박살이 날 것이다. 그러고 자신의 몸도 건물의 잔해와 같이 흩어지리라. 먼저 죽어간 아들처럼...
케이튼은 문득 뒤통수가 환하게 밝아지는 걸 느꼈다. 괴물들이 쏘아내는 서치라이트였다. 이제 이 건물이 괴물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케이튼은 고개를 들었다. 과연 괴물들이 건물의 몇 십 미터 밖에서 직진해오고 있었다. 불길한 직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케이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끝이다. 이제 먼저 간 두 아들 뒤를 따르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친 비겁한 아비에게 내리는 하늘의 벌인 것이다. 케이튼은 가만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돌연 캐터필러가 구르는 소리와 괴물의 발자국 소리가 한쪽으로 꺾이면서 멀어지고 있었다. 케이튼은 건물의 허물어진 벽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괴물들은 조금 전 엘리시온들이 도주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진격하고 있었다.
‘겨우 살았는가...’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안도감에 케이튼은 맥이 풀렸다. 그러나 그가 바닥에 주저 않기도 전에 상황은 다시금 비관적으로 변해버렸다. 레이저 건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건물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주변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라!”
놈들 중 몇몇이 케이튼이 숨어든 건물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이튼은 건물 입구의 반대편으로 재빨리 몸을 굴렸다. 그러고는 허물어져 형체가 희미한 벽난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너덜거리던 건물의 문짝을 거칠게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문짝이 박살나면서 병사 두 명이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들어왔다.
손전등으로 입구 주변의 허물어진 벽을 비추던 한 놈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재빨리 동료에게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방금 여기에 한 놈이 숨어 있었어!”
그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동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과 일분 전이로군.”
순간 벽난로 속에 숨어 있던 케이튼은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병사들은 이 건물에 숨은 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삭였지만, 케이튼이 인간의 열 배에 달하는 청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케이튼은 숨을 죽이고 몸의 일부라도 벽난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바짝 움츠렸다. 그러나 그도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눈에 착용한 보안경은 인체가 이분 전까지 발산한 열을 감지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두 병사는 잔열(殘熱)의 흐름을 쫓았다. 잔열은 바닥에 깔리는 듯하다가 곧장 벽난로 속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주고받은 후 벽난로 주위의 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번쩍!
레이저 건이 두 줄기 광선을 뿜었다. 두 줄기 광선은 각각 벽난로의 좌우를 관통했다. 병사들은 천천히 레이저 건을 움직여 원을 그렸다. 조각을 하듯 벽난로를 도려냄으로써 그 뒤에 숨은 놈을 토막낼 작정이었다.
케이튼은 두 줄기의 광선이 벽난로의 벽을 관통하여 몸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생존의 본능을 따라 벽난로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시온은 대부분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엘리시온들 중에서도 특히 체력이 뛰어난 케이튼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빨랐다.
“어?”
이 돌발적인 상황에 두 병사는 놀란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미처 반사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케이튼은 커다란 주먹으로 한 녀석의 턱을 후려쳤다.
뻑!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육중한 몸이 공중으로 솟았다. 놈은 두 길 높이나 되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가 곧장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걸로 끝이었다. 놈은 천장에 부딪치기도 전에 케이튼의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안면 골이 함몰하고 목뼈가 부러져 즉사한 상태였다.
나머지 한 녀석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이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 사이 케이튼은 녀석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우드득!
녀석의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는 감촉이 주먹을 통해 느껴졌다.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가슴을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부러진 뼈가 폐를 찌른 듯 그는 입에서 피를 게워내며 몸부림쳤다.
피를 보자 살고자하는 본능은 아들을 잃은 복수심과 보태어져 살육의 본능으로 이어졌다. 케이튼은 나직이 신음하는 병사의 머리를 짓밟았다. 인간들의 괴물이 비투를 짓밟은 것처럼... 그 병사는 머리가 박살나 뇌수를 뿌리며 죽고 말았다.
이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케이튼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후련함은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밀려 금방 사라졌다.
‘괴물들이 도시 밖으로 도주하는 동료들을 쫓아갔다.’
그렇다면 도주할 방향은 오직 한 곳, 인간들이 거주하는 도심이었다. 진압군의 목적은 엘리시온이었으므로 진압군의 괴물들이 인간의 거주 공간에 들어갈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케이튼은 두 녀석의 시체를 쉽게 발견되지 않게끔 한쪽 구석에 치워두고 밖을 살폈다. 진압군의 대부분은 동쪽으로 몰려간 후라, 건물 주변엔 병사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힘이 넘쳐나는 근육질의 다리와 어둠에 의지하면, 저들의 눈길을 피할 수도 있을 법했다.
케이튼은 망설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무전으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 이 건물 안의 두 녀석이 죽은 사실이 발각될 것이었다. 케이튼은 주변의 모든 병사들이 여러 건물들 안으로 자취를 감춘 틈을 포착하여 재빨리 뛰쳐나왔다. 방향은 서쪽! 인간들의 거주 공간이었다.
케이튼의 질주는 네 다리 달린 짐승처럼 빨랐다. 어둠과 건물들의 벽에 몸을 숨기며 바람처럼 달리는 그를 발견하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서쪽으로 수 백 미터를 나가자 완파된 건물들의 잔해만이 깔린 지역이 나타났다. 진압군의 괴물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취였다.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잔해 사이사이로 잘려나간 팔다리와 머리, 그리고 불에 타다만 살점들이 이 참혹한 현장을 수놓고 있었다. 이 어딘가에 비투와 주루의 시체도 있을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의 아들딸들이여! 오늘의 일은 죽어서도 잊지 않겠노라. 반드시... 반드시 오늘의 복수를 하겠노라!’
케이튼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도주했다.
잔해가 깔린 지역을 가까스로 벗어날 즈음 좌우로 숲이 길게 늘어선 도로가 나타났다. 엘리시온과 인간의 거주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지역이었다.
도시의 중심부와 외곽은 이 경계지역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분리되었다. 엘리시온들의 집이 대부분 초라한 단층의 석조 건물인데 비해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다채로운 색상의 특수 유리로 지어 올린 수십 층의 빌딩과 호화로운 정원에 둘러싸인 단층 혹은 이층의 가옥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대조적인 건물들이야말로 인간과 엘리시온들 간의 빈부격차의 상징인 것이다.
케이튼은 숲을 지나 도로를 건넜다. 그리고 다시 도로와 인간의 거주지역 사이의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숲의 어둠 속에서 한 병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와 케이튼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이봐! 이제 대충 정리된 것 같군.”
케이튼과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케이튼은 재빨리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다른 병사가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냐! 저기 한 녀석이 꿈틀거리는 걸.”
케이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병사 두 명이 바닥을 들쑤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은 보안경의 기능에 의지하여 야간에도 대낮처럼 볼 수 있었지만, 케이튼은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시력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움직임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처음 소리친 병사가 나중에 응답한 병사에게 다가가면서 중얼거렸다.
“어? 살아 있는 놈이 있었군.”
나중에 응답한 병사가 바닥에 쓰러진 거무스름한 물체를 발로 툭툭 차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지? 끌고 갈까?”
“귀찮은 짓을 왜 하나! 이깟 짐승 같은 놈은 그냥 죽여버리지.”
놈들은 바닥의 거무스름한 물체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거무스름한 물체는 미미하게 꿈틀거리면서 신음했다. 그러나 두 중기의 광선이 번쩍이자 순간 신음은 멎었고 꿈틀거림도 멈추었다.
‘잔혹한 놈들...!’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번쩍거린다. 이왕 살인을 한 몸이다. 인정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살인마들을 응징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케이튼의 몸이 움직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물적인 체력을 지닌 그였다. 나무에서 튀어나와 십여 미터 떨어진 놈들을 덮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두 병사가 케이튼의 존재를 깨닫고 총구를 돌리는 순간, 케이튼의 두 주먹이 놈들의 턱과 가슴을 강타했다. 두 병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이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케이튼은 바닥에 쓰러진 두 놈을 차례로 걷어찼다.
“죽어라, 악마 같은 놈들! 죽어버려라!”
케이튼은 쌓이고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풀 듯 고함치며 두 놈을 마구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튼의 광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케이튼이 겨우 이성을 차릴 즈음, 두 놈은 피범벅이 되어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는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으면서 본래의 처지를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위험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병사들은 아직 이 주위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들키기 전에 인간의 거주 지역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케이튼은 두 병사의 시체를 가까운 나무 아래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주변의 나뭇잎을 긁어모아 두 병사의 몸을 덮었다. 케이튼이 두 병사의 시신을 완전히 은폐시킨 다음 도시 중심부 쪽으로 달려가려 할 때다.
번쩍!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는 듯하더니 오렌지 빛 광선이 케이튼의 곁을 지나 나무를 꿰뚫는다. 케이튼은 소스라치게 놀라 근처의 나무로 몸을 숨겼다. 어깨가 화끈거리고 살 타는 냄새가 피뜩 코를 찌르고 사라진다.
‘어깨를 스쳤구나!’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아무리 몸이 빠른들 레이저 광선을 보고서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방의 서툰 사격 솜씨에 감사하면서 케이튼은 귀를 곤두세워 발자국 소리를 찾았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걸음을 멈추고 나의 동정을 살피는 걸까?’
케이튼이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쿵! 돌연 케이튼이 몸을 기댄 나무가 밑동부터 흔들렸다. 케이튼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케이튼이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시커먼 물체 하나가 달려든다. 케이튼은 엉겁결에 발을 들어 놈을 걷어찼다. 놈이 가슴을 맞고 멈칫거린다. 그 사이 케이튼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놈의 가슴을 후려쳤다.
쾅! 마치 철판을 후려친 듯한 소리가 난다. 주먹을 통해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든다.
케이튼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놈이 바짝 따라붙으며 주먹을 날린다. 번개같은 속도다. 케이튼은 가까스로 놈의 주먹을 피했지만,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음이 고막을 찔렀다.
케이튼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공포를 느꼈다. 놈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놈의 주먹을 한 대만 맞는다면,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를 지닌 케이튼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간 조금 전처럼 광선 공격을 받을 것이었다.
케이튼은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상대방은 얼굴을 절반쯤 가린 헬멧을 쓴 병사였다. 케이튼은 상대의 몸을 껴안고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놈도 두 팔로 케이튼을 와락 껴안았다. 서로가 팔을 엇갈린 채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곧, 케이튼은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의 힘이 자신보다 터무니없이 강했던 것이다.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엘리시온들 중에서도 이처럼 강한 힘을 가진 자는 드물었다.
우드득! 상대가 조여드는 힘을 이기지 못해 갈비뼈가 비명을 지른다. 숨이 턱 막힌다. 상대방의 몸통을 죄던 케이튼의 팔이 무기력해지면서 풀린다. 그에 따라 상대방의 죄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뜩해진다.
‘이렇게 죽는 건가...’
자신의 최후를 실감하면서 케이튼이 절망할 때다. 쿵! 상대방의 몸이 한 차례 크게 울리는가 싶더니 케이튼의 몸통을 껴안은 두 팔이 스르르 풀렸다.
겨우 숨통이 트여 기침하는 케이튼의 시야에 희끗희끗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그림자는 바람처럼 움직여 케이튼을 공격했던 병사와 엇갈리면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 채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병사의 덩치는 케이튼 못지 않게 우람했다. 반면 하얀 그림자는 키가 케이튼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고, 몸은 앙상하기까지 했다. 케이튼은 그가 하얀 옷에 수염을 기른 육순 가량의 왜소한 사내라는 걸 알아보았다.
일순 커다란 병사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맥없이 쓰러졌다.
“위험한 순간이었네.”
하얀 옷의 사내는 소매를 털면서 케이튼에게 다가왔다.
케이튼은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같은 인간인 병사를 죽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인간이다! 엘리시온의 적이자 증오의 상징인 인간인 것이다!
케이튼은 적개심이 끓어올라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어렵잖게 슬쩍 몸을 틀어 케이튼의 주먹을 흘려버렸다. 케이튼은 재빨리 방향을 바꾸며 팔을 활짝 벌렸다. 왜소한 상대를 붙잡아 내팽개칠 생각이었는데, 그에 앞서 사내가 나직이 호통했다.
“목숨을 구해주었더니 오히려 죽이려드는가!”
케이튼은 멈칫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다는 표현이 옳았다. 상대방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노려보기만 할 뿐인데, 무형의 힘이 케이튼의 팔다리를 꼼짝하지 못하게끔 억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케이튼이 혼란스러워하는데, 노인이 싱긋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난 호릉(胡綾)이라고 하네.”
순간 케이튼은 온몸을 짓누르던 무형의 힘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는 얼떨떨하여 저도 모르게 호릉의 손을 잡았다.
“나, 난 케이튼이오.”
“여긴 자네들이 침입하지 못하게끔 진압군들과 안드로이드(Android)들이 지키고 있네.”
“안드로이드? 이 놈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란 말이오?”
“혈랑(血狼)이라고 불리는 특수부대의 전투로봇이지. 겉은 인간처럼 생겼지만, 수십 마력의 힘에 몸에서 레이저 광선을 뿜는 놈들이야. 일단 놈의 시야에 걸리면 도망갈 수 없어. 인간이 남긴 체온을 감지하면서 추적하니까. 이놈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이렇게 박살 낼 수밖에 없지.”
“박살이라고?”
케이튼은 고개를 기웃하며 안드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안드로이드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다.
케이튼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호릉은 희미하게 웃었다.
“속을 부수었네. 예부터 내려오던 무술이라는 것이지.”
호릉은 케이튼의 어깨를 툭 지면서 말했다.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와 수 백 명의 병사들이 숲을 수색하고 있네. 여기에 있으면 죽고 말아. 날 따라오게.”
“어째서 날... 도와주는 것이오?”
머뭇머뭇 묻는 케이튼의 얼굴엔 의아함과 의심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자넨 인간들을 증오하고 있군.”
“내 아들과 아내가... 그리고 수많은 동료들이 무참히 죽었소. 바로 당신과 같은 인간에게 말이오.”
호릉은 침울하게 말했다.
“애석한 일이네. 왕푸친은 제 욕심에 눈이 멀었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백성들을 도탄으로 몰고 가고 있지. 같은 인간으로서... 난 자네들에게 오직 미안함 마음뿐일세.”
“그런 말로써 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호릉은 케이튼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면서 탄식했다.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면 이대로 남게나. 하지만 모든 인간이 똑 같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호릉은 케이튼이 따라오든 말든 등을 돌렸다.
케이튼은 망설였다. 이대로 호릉을 따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따라간다면 굴욕이었다. 그렇다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호릉의 뒷모습이 거의 사라질 때까지 갈등하던 케이튼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호릉을 믿는다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서 복수하기 위하여 힘겹게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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