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흔들리는 지구_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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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0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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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같은 시기. 런던 신류원.

“박사는 정녕... 하늘이 내린 사람이오.”
키튼 경은 늙어서 말라붙은 입술을 연신 혀로 축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달이주계획이 성공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오. 이제 달엔 생명이 넘실거리고 있소. 하늘엔 새가 날고 땅에는 뭇 짐승들이 뛰어 놀며 바다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소. 백만 명에 달하는 개척민들이 도시를 건설했고,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소. 이 모두가 박사의 초인적인 두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박사가 인류를 구원한 것이오.”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만면에 머금고서 떠들어대는 키튼 경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라고 아이헨도르프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이처럼 추하게 늙을 수도 있는 것을... 어찌하여 그대는 이 모양이 되었소?’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 남을 칭찬하는 데 인색한 법이었다. 공연히 남을 면전에 두고서 칭찬한다면 반드시 배다른 속셈을 품고 있기 마련이었다.
키튼 경은 누군가가 자신을 치켜 세우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고 그 누군가란 다름 아닌 아이헨도르프인 것이다.
‘나 더러 자신의 공을 폐하게 적극 주청해 주길 바라는 게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겸양의 말을 던졌다.
“달이주계획이 어찌 나의 공이라 할 수 있겠소? 폐하의 의지가 이 몸을 통해 실현된 것이오.”
“박사는 겸양하시구려. 박사가 없었다면 그 누가 폐하의 뜻을 실천할 수 있었겠소?”
아이헨도르프는 역겨움을 참고 웃어 보였다.
“허허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지 않소?”
아이헨도르프의 밝은 표정을 보면서 키튼 경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이처럼 아이헨도르프를 칭찬하며 매달리는 데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던 총독들은 거의 제거된 상태였다. 이제 왕푸친만 제거된다면 황제를 거역할 자는 모두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이는 곧 황제의 철권통치가 다시금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됨을 의미했다. 총독들의 반역을 주도한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 아니던가? 왕푸친이 사라지기 전에 황제의 용서를 얻지 못한다면, 자신 또한 이미 사라져간 총독들과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키튼 경으로선 어떻게 해서라도 황제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야만 했고,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이헨도르프뿐이었다.
키튼 경은 문득 안색을 심각하게 굳혔다.
“달이주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폐하께 반기를 들었던 총독들은 대부분 물갈이되었소. 이제 근심거리는 없어졌소. 왕푸친만 제외하면...”
키튼 경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으로 아이헨도르프를 바라보았다. 그의 내심을 모를 아이헨도르프가 아니었다.
“세상이 이처럼 정리된 데는 경의 공이 컸소. 그대의 밝은 책략이 총독들을 분열시켰고, 그 덕분에 각 지구는 폐하의 충신들이 다스리게 되었소.”
비로소 키튼 경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별 말씀을... 난 그저 폐하를 위해 충성하고자 하는 일념뿐이었소. 공이라 할 게 무엇이겠소?”
“왕푸친이 세린의 처형을 주장한 이후로, 그대와 폐하 사이의 거리가 소원했소. 이제 그대의 공이 적지 않으니, 폐하께서도 과거의 앙금을 푸실 것이오. 일간 그대와 폐하가 함께 할 자리를 마련해보겠소이다.”
“고맙소, 박사!”
키튼 경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이헨도르프의 손을 와락 잡았다. 그는 열 번씩이나 감사의 말을 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튼 경이 원장실을 나간 직후, 아이헨도르프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면서 혀를 찼다.
“나 같으면 그렇게 비굴하게 연명하느니... 차라리 왕푸친과 같은 길을 택할 것이오, 키튼 경.”
이때 맞은편 벽면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스크린이 나타났다.
“신류원 주위에 정체불명의 사내 둘이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경비병을 보내 그들을 감시하려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워낙 신속하여 놓쳐버렸습니다. 경비병들의 목격에 의하면 그들은 인간이 아닌 듯합니다.”
스크린을 통해 보고하는 자는 신류원의 경비를 책임진 이반 소령이었다.
“정체불명에 인간이 아니라...”
나직이 중얼거리던 아이헨도르프는 짚이는 바가 있어 실소했다.
“그럴 만도 할 게야. 나와 키튼 경을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겠지. 왕 총독으로선...”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는 원장님께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고 키튼 경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경호원을 붙이겠습니다.”
아이헨도르프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키튼 경의 간계가 필요하여 묵인하긴 했지만, 폐하께선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네.”
이반 소령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다가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스크린이 사라지고 벽면이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아이헨도르프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는 신류원의 정문 앞으로 정원수와 여러 조각 물로 조경된 공원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곧 키튼 경이 이곳으로 나타날 테지...”

강화유리로 제작된 자동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키튼 경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신류원의 정문을 나섰다. 그 동안 그의 가슴을 천근만근 짓누르던 근심거리가 깨끗이 해소된 것이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문의 좌우로 정렬한 경비병들을 지나쳐 자신이 소유한 수직이착륙 경비행기가 대기하고 있는 공원의 중심부로 향했다. 경비행기에는 조종사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비행기 앞에 이르러 키튼 경은 이례적으로 뒤따르던 두 명의 경비병들에게 수고의 말을 던졌다.
“수고하게.”
막 경비행기의 문을 열던 키튼 경은 문득 신류원 앞을 지나가는 도로를 가로질러 공원 쪽으로 곧장 뛰어오는 두 사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인간이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었나...?’
그건 달린다기보다 난다고 하는 표현이 더욱 어울렸다. 키튼 경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 두 사내는 공원으로 뛰어들었고, 이어 허공으로 훌쩍 날라 올랐다.
키튼 경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 사내는 어느새 경비행기 위로 내려서고 있었다.
키튼 경에게 놀람이라는 감정이 미처 찾아들기도 전에, 두 사내의 오른쪽 팔뚝이 팔꿈치로부터 떨어져나갔다. 팔뚝이 있어야 할 자리에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총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안드로이드...”
이것이 키튼 경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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