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흔들리는 지구_19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 관리자

  • 2001-06-01

  • 2,721 회

  • 0 건

본문

19.

카나이마 1세는 시종을 거느리고 황궁의 정원을 거닐었다.
메마른 하늘빛이 유달리 높은 봄날이었지만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마치 초여름처럼 더운 날씨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통에 그는 엄동설한에 알몸을 드러낸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을 것인가? 나의 불찰이로다. 내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역사 속의 지배자들처럼, 그가 백성을 권력의 희생양으로 여겼더라면 이런 고민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자들을 경멸하고 평생토록 백성을 위한 마음가짐만으로 살아온 그이기에 이토록 고민하는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려 바람을 한껏 들이키던 카나이마 1세는 문득 정원의 한 구석에서 분홍빛 꽃 몽우리를 머금은 화초 한 그루를 발견했다.
‘작년쯤 가을쯤이던가...?’
그는 그 화초가 관상용으로 키우다가 무심코 버렸던 화분의 봉선화임을 기억해내었다.
“아름답구나... 그러고 기특하구나.”
카나이마 1세는 아직 설익은 꽃송이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이 연약해 보이는 꽃 한 송이마저도 버려진 슬픔과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자연은 이런 것이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욕심을 부리는 법도 없이 그저 저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저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로를 의지하고 조화하면서...”
그러나 인간은 달랐다. 인간은 해서는 안 될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자연을 짓밟았다. 보존과 조화를 부르짖는 목소리는 제 이익과 결부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꺼져버렸다. 아니 꺼져버리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보존과 조화를 주장하던 지식들이 이익에 얽히면서 파괴를 용납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 누구보다도 이를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이 바로 카나이마 1세였다. 그는 회한에 잠겼다.
“내가 바로 그러했었지. 지구녹지화 계획은... 그것은...!”
갑자기 카나이마 1세는 전신을 격하게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불현듯 한 가지 깨달음이 그의 뇌리를 할퀴었기 때문이다. 달이주계획이 이 백 년 전 자신이 추진하였던 지구녹지화 계획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사실을. 단지 백 오십 년이라는 시간과, 지구와 달이라는 공간을 뛰어넘었을 뿐이라는 걸. 그러고 달이주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자신을 반대하는 총독들을 숙청하려 꾸며낸 계책이라는 게 결국은 수많은 제국의 백성들을 고통 속으로 몰고 들어간 이기적인 발상에 불과했음을.
“아아! 난 무엇 때문에 달이주계획을 추진하였던가...?”
백성들에게 영원히 안주할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함이었거늘... 폭동의 와중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그 보금자리를 밟아보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지 않는가?
한 줄기 뇌전이 정수리를 뚫고 들어와 심장을 태웠다. 끝 모를 절망감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진작에 깨달았어야 할 일이었다. 나라는 인간도 결국 어리석음의 쳇바퀴를 맴도는 존재에 불과하였음을.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그토록 몸부림쳤건만... 그리하여 올바른 신의 길을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고 또 확신하였건만... 난 또다시 스스로 오만하여 진흙탕 속에 빠져버렸던가? 결국은 나도 내가 그토록 경멸하고 경계하던 그런 속물에 지나지 않았던가...?
“아!”
카나이마 1세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이제껏 그를 지탱해주던 생명의 에너지가 일시에 빠져나가고 있었다. 좌절과 절망이 찾아들면서 희망이 무너지고 있었다.
‘세린...! 난 과거의 과오를 다시 반복하고 있었더냐? 어째서 넌... 나로 하여금 또다시 그런 전철을 밟게 하였느냐?’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숨이 막히고 손발이 저리더니 이윽고 시야가 한 점으로 좁아졌다.
카나이마 1세는 자신의 세상이 끝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이 주신 육체는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세린... 세린...! 왜 진작 말을 해주지 않았느냐? 왜 내게 이런 길을 걷게 한 것이냐? 이 마저 어쩔 수 없는 섭리였더냐? 정녕 그랬더냐...’
카나이마 1세는 통곡했다.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만이 그의 심정을 대변할 뿐이었다.
그렇게... 주변은 암흑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